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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필사]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일부) "너한테는 젊음, 자신감, 일자리가 있지." 나이가 위인 웨이터가 말했다. "모든 걸 다 갖고 있어." "그러는 선배는 뭐가 부족한데요?" "일 말고는 모든 게 부족하지." "선배도 내가 가진 걸 다 갖고 있잖아요." "아냐. 나는 자신감은 가져본 적이 없고, 이제 젊지도 않아." "왜 이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문이나 잠가요." "나는 카페에 밤늦게까지 앉아 있고 싶어하는 쪽이야." 나이가 위인 웨이터가 말했다. "잠들고 싶지 않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 밤에 불을 켜두어야 하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 더보기
[필사] 밤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옷을 입고 (전문) 밤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옷을 입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밤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옷을 입고한 줌 꿈을 뿌린다.꿈은 마음속에 속속들이 스며들어나를 취하게 한다. 어린아이들이 금빛 호두와불빛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를 보듯나는 본다, 네가 5월의 밤을 거닐며꽃송이 송이마다 입맞춤하는 것을. 더보기
[필사] 하얀 국화가 피어 있는 날이었다 (전문) 하얀 국화가 피어 있는 날이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하얀 국화가 피어 있는 날이었다.그 짙은 화사함이 어쩐지 불안했다.그날 밤 늦게 조용히네가 내 마음에 다가왔다. 나는 불안했다. 아주 상냥히 네가 왔다.마치 꿈속에서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네가 오고, 그리고 동화에서처럼은은히 밤이 울려 퍼졌다. 더보기
[필사]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전문)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햇살처럼 꽃보라처럼기도처럼 왔는가. 반짝이는 행복이 하늘에서 내려와날개를 접고꽃피는 나의 가슴을 크게 차지한 것을……. 더보기
[필사] 고요한 집의 창문에는 빨갛게 노을이 타고 (전문) 고요한 집의 창문에는 빨갛게 노을이 타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요한 집의 창문에는 빨갛게 노을이 타고정원은 온통 장미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흰 구름 사이마다 높이 저녁 어둠이움직이지 않는 대기 속에서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종소리 하나가 강가의 마을로 흘러들었다……하늘나라가 호소하는 것처럼 상냥하게.그리고 나는 보았다. 속삭임이 가득한 자작나무 위 높이반짝이기 시작한 새 별들을 은밀하게 밤이해쓱한 청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을. 더보기
[필사] 둔탁한 회색 하늘에서 (전문) 둔탁한 회색 하늘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둔탁한 회색 하늘에서모든 빛이 불안스레 퇴색해 간다.멀리 매맞은 자국과도 같이한 줄기 새빨간 선이 있을 뿐. 혼란스러운 노을빛이 사라졌다가는 다시 살아난다.그리고 실바람 속에있는 듯 없는 듯 장미 향기 같은 것이,소리 없이 흐느끼는 울음소리 같은 것이……. 더보기
[필사]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전문)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향긋한 미풍 속에청동색 풀 줄기 속에외로운 귀뚜라미의 노래. 내 영혼 속에도 깊숙이서럽고 그리운 노래가 울린다.열병을 앓는 아이에게는돌아간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이렇게 들리리라. 더보기
[필사] 저녁 (전문) 저녁 라이너 마리아 릴케 변두리의 마지막 집 뒤로쓸쓸하게 빨간 저녁 해가 진다.장중한 시의 끝맺이를 외며낮의 환호성이 그친다. 그 잔광은 늦게까지도지붕 모서리에 여기저기 남으려 한다,어느새 검푸른 먼 하늘에밤이 다이아몬드를 뿌릴 때. 더보기
[필사] 죽음을 앞둔 어느 노철학자의 말 (전문) 죽음을 앞둔 어느 노철학자의 말 / 월터 새비지 랜더 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 다음으로는 예술을 나는 사랑했다. 나는 삶의 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더보기
[필사] 가지 않은 길 (전문)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사람이 밟은 흔적은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아,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그것이 내 운명을 .. 더보기
[필사] 설국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현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설국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맞은 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더니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었다. 차가운 냉기가 밀려들었다. 처녀는 차창으로 몸을 한껏 내밀고 멀리 외치듯이 소리를 쳤다."역장니임! 역장니임!"등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고 온 사나이는 목도리를 콧등까지 두르고, 귀에 모자의 털을 내려뜨려 드리우고 있었다.벌써 그런 추위인가 싶어 시마무라가 밖을 내다보니, 철도관사인 듯싶은 바라크들이 산기슭에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빛은 거기까지 가기 전에 어둠에 삼켜져버렸다."역장님, 저예요. 안녕하셨어요?""아, 요코 아냐, 돌아왔군. 또 추워졌어!""동생을 이번에 여기서 일하게 해주셨다지요? 폐가.. 더보기
[필사] 지하생활자의 수기 지하생활자의 수기 / 도스토예프스키 그 무렵 나는 겨우 스물 네 살이었으며 은둔형 외톨이였다. 나는 나의 얼굴을 증오했으며, 병적일 정도로 지능이 발달해 있다. 일반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훌륭한 인간은 겁쟁이요 노예여야만 했다. 어느 밤 당구장에서 벌어진 싸움판에 끼어들 요량으로 당구대 옆에 서 있었는데 어느 장교가 나를 옮겨 놓고 지나가버렸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산책 중에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느끼는 수치심을 그 장교에게 전달하면 복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류사회사람처럼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그 장교와 어깨를 부딪히는 것으로 복수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어느 목요일 외로워서 동창생 시모노프의 집을 방문했다. 그 집에서 동창생들이 장교가.. 더보기
[필사] 지하철 정거장에서 (전문) 지하철 정거장에서 / 에즈라 파운드군중(群衆)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더보기
[필사] 진달래꽃 (전문)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더보기
[필사] 귤 (전문) 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느 흐린 겨울 저녁이었다. 나는 요코스카 발 상행선 이등 객실의 구석에 앉아 멍하게 발차 기적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전등이 켜진 객실 안에는 신기하게도 나 외에는 승객이 없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희미하게 어둠이 묻어오는 플랫폼에도, 오늘은 웬일인지 전송하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끊어지고 없었다. 오직 조그만 바구니 안에 담긴 강아지 한 마리가 이따금 구슬프게 짖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광경은 당시의 내 마음과 이상하리만치 딱 들어맞는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내 머릿속에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피로와 권태가, 흡사 눈이 내릴 듯 잔뜩 흐린 하늘과 같은 어둠침침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나는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꾹 쑤셔넣은 채, 주머니에 들어 있던 석간신문을 꺼.. 더보기
[필사] 금각사 금각사 / 미시마 유키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자주 금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마이즈루 동북쪽의, 일본해로 튀어나온 쓸쓸한 곶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그곳이 아니라, 마이즈루 동쪽 근교에 위치한 시라쿠라는 마을이다. 절간에 입양되어 승적에 오른 후, 외딴 곶에 위치한 절의 주지가 되었고, 그곳에서 신부를 맞이해 나를 낳았다. 나리우 곶의 절 부근에는 마땅한 중학교가 없었다. 이윽고 나는 부모님 슬하를 떠나 아버지 고향에 있는 숙부 집에 맡겨지게 되어, 그곳에서 히가시마이즈루 중학교에 도보로 통학하였다. 아버지의 고향은 햇빛이 유별나게 눈부신 곳이었다. 하지만 1년 중, 11월이나 12월 무렵에는 구름 한 점 없어 보이는 쾌청한 날씨에도, 하루에 너덧 차례나 소나기가 지나갔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