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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오늘 있었던 일 아버지께서 심부름을 시키셨다. 칫솔 한 다스, 맥주 한 병, 레종 그린. 어머니께서 라면 묶음으로 된 것을 한두 개 알아서 사오라고 하신다. 나는 “아, 힘들어.”하고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서너 번이고─아니, 분명 다섯 번은 넘었다─얼른, 갔다 와, 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늘어질 대로 늘어진 목소리’라고 문득 생각했다.여태껏 쓰고 있던 것들을 전부 내려놓고, 나는 반바지를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웃옷은 괜찮았다. 그때부터 내 호흡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얼른’ 양말을 신었고 점퍼를 걸쳤다. 거실과 안방 사이에 몸을 기댄 채 지친 듯이 “레종 그린, 맥주 카스 한 병, 칫솔 묶음, 라면 알아서, 맞지?” 하고 소리 냈다.아버지께서 카드를 주셨는데 꼭 잔돈이라도 거슬러 주는 것 같았.. 더보기
오늘 꾼 꿈 로또를 했다. 꿈속에서 나는 가족끼리 여행을 갔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4인승 승용차를 타고 조금 외진 시골 도심을 가로질렀다.낮이었고, 아니, 정오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어야 했다. 우리는 많은 음식을 싸가지고 차를 탔었다. 피자도 있었고 햄버거 같은 것도 있었고 여러 가지 과자도 있었던 것 같다.하도 배가 고파서 우리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쉬엄쉬엄 식사를 하기로 했었나? 아니다. 기름이 없었다. 주유소가 아무래도 보이지 않아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동네 슈퍼 쪽으로, 나와 아빠는 들어갔다. 무슨 사탕 자판기에서 적당량의 기름을 오천 원에 판다고 표지판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아빠는 기름통을 손에 들고 햇빛에 반딱이는 검정 자판기 뒤쪽 연결된 검은 통에 기름을 가득 채워 넣었다. 그리고 자판기 왼.. 더보기
심해 불 꺼진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린 채 검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불길한 감각이 돌연 찾아와서 소름이 돋아났다. 미역 줄기가, 마치 어둡고 답답한 심해의 수많은 미역 줄기가 발 끝에서부터 스믈스믈 기어올라 오는 느낌이었다. 정강이, 무릎, 양쪽 허벅지를 거쳐 골반을 타고 배를 축축히 적시면서 명치 가까이 미끄러지듯 다가든다. 기분 나쁜 축축함. 그뿐이었다.그때 세상에 햇살이 비추어 들었다. 지금까지 가망 안 보이는 감옥 속에 처박혀 있었는데, 한순간에 태양 저편 사람들의 사회 속으로 처박히게 되었다. 그랬다. 딸깍 하는 소리는 새로운 인생을 향한 출발 신호였다."불 꺼두고 뭐해. 나 공부할 거니까, 말 걸지 마.""……." 나는 침묵으로 일관한다.방문을 열고 들어온 김성연.. 더보기
이상한 여자아이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상한 여자아이를 보았다. 이상한 여자아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내 옆을 스쳐지나갔는데, 샴푸? 세제? 뭔가 상큼한 냄새가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펴보았다.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가방을 멘 그 여자아이는 내 어깨 밑에서, 정수리를 내보이면서, 빠르게 지나쳐갔다. 적갈색 단발머리를 늘어뜨린 채. 휘날리면서. 나는 멍청히 서서 눈만을 끔뻑거렸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신호등이 바뀐 줄도 모르고, 나는 우뚝 선 채로, 주변의 욕설을 들으면서도, 그녀의 모습을 상상 속으로 그려 넣었다. 형태, 냄새, 촉감 등. 무척 창조적인 마음으로. 그런데 돌연 마음이 답답해졌다.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충동이었다. 그 무언가와 그 무언가로 인해. .. 더보기
언리얼라이브 〈 NPC를 죽일 수 있다고? 〉〈 아나 누가 페토슨 죽였는데 〉〈 트라비아 NPC들 절반이 죽은 듯 〉〈 이제 상점 이용 못 하네 〉〈 두 시간이 지났는데 운영자 모르는 듯 〉〈 문의전화 받긴 하는 거야? 〉〈 공지조차 안 때리네 〉 습관처럼 열어본 브라우저 자유게시판에는 그런 글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온통 한 주제 일색이다. ‘NPC를 죽일 수 있는 버그’ 대략 한 시간 전부터 발생한 시스템 오류인 것 같았다.버스의 카드기기 지지대를 팔 안쪽으로 끌어안으면서 오른손을 뻗는다. 검지와 중지를 붙인 채 시야 정중앙에 떠오른 브라우저 윈도우를 잡아끌 듯이 아래로 훑자, 허공에 떠 있던 홀로그램 인터넷 윈도우는 흐릿해지더니 금방 모습을 감췄다. 버스 벽면에 부착된 성형외과 광고판이 시선을 사로잡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