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있었던 일
아버지께서 심부름을 시키셨다. 칫솔 한 다스, 맥주 한 병, 레종 그린. 어머니께서 라면 묶음으로 된 것을 한두 개 알아서 사오라고 하신다. 나는 “아, 힘들어.”하고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서너 번이고─아니, 분명 다섯 번은 넘었다─얼른, 갔다 와, 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늘어질 대로 늘어진 목소리’라고 문득 생각했다.여태껏 쓰고 있던 것들을 전부 내려놓고, 나는 반바지를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웃옷은 괜찮았다. 그때부터 내 호흡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얼른’ 양말을 신었고 점퍼를 걸쳤다. 거실과 안방 사이에 몸을 기댄 채 지친 듯이 “레종 그린, 맥주 카스 한 병, 칫솔 묶음, 라면 알아서, 맞지?” 하고 소리 냈다.아버지께서 카드를 주셨는데 꼭 잔돈이라도 거슬러 주는 것 같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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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여자아이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상한 여자아이를 보았다. 이상한 여자아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내 옆을 스쳐지나갔는데, 샴푸? 세제? 뭔가 상큼한 냄새가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펴보았다.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가방을 멘 그 여자아이는 내 어깨 밑에서, 정수리를 내보이면서, 빠르게 지나쳐갔다. 적갈색 단발머리를 늘어뜨린 채. 휘날리면서. 나는 멍청히 서서 눈만을 끔뻑거렸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신호등이 바뀐 줄도 모르고, 나는 우뚝 선 채로, 주변의 욕설을 들으면서도, 그녀의 모습을 상상 속으로 그려 넣었다. 형태, 냄새, 촉감 등. 무척 창조적인 마음으로. 그런데 돌연 마음이 답답해졌다.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충동이었다. 그 무언가와 그 무언가로 인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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